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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충우 칼럼] 문학포구- 장흥 회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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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0.02.03  19: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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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술가 통신일보 고문 / 한재 신충우  
 

소설가 이청준의 단편소설『선학동 나그네』의 서두이다.

“남도 땅 장흥(長興)에서도 버스는 다시 비좁은 해안 도로를 한 시간 남짓 내리달린 끝에, 늦가을 해가 설핏해진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야 종점지인 회진(會鎭)으로 들어섰다.
차가 정류소에 멎어 서자, 막판까지 넓은 차칸을 지키고 앉아 있던 칠팔 명 손님이 서둘러 자리를 일어섰다. 젊은 운전 기사 녀석은 그새 운전석 옆 비상구로 차를 빠져 나가 머리와 옷자락에 뒤집어쓴 흙먼지를 길가에서 훌훌 털어 내고 있었다.

사내는 맨 마지막으로 차를 내려섰다. 차를 내린 다른 손님들은 방금 완도 연락을 대기하고 있는 여객선의 뱃고동 소리에 발걸음들이 갑자기 바빠지고 있었다.
사내는 발길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배를 탈 일이 없었다. 발길을 서두르는 대신 그는 이제 전혀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한동안, 밀물이 차 오르는 선창 쪽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다가 그는 뒤 늦게 무슨 할 일이 떠오른 듯 눈에 들어오는 근처 약방으로 발길을 황급히 재촉해 들어갔다.

약방에서 사내는 이마에 저녁 볕 조각을 받고 앉아 있는 젊은 아낙에게서 바카스 한 병을 샀다. 거스럼돈을 내주는 여자에게 그가 물었다.
"아주머니, 요즘 물때가 저녁 만조(滿潮)겠지요? "
"그러겠지라우. 보름을 지낸 지가 엊거제니께요. 지금도 하마 물이 거의 차 올랐을 텐디요."
거스름을 내주며 묘하게 게으르고 건성스러워 들리는 사투리의 여자에게 사내가 다시 재우쳐 물었다.
"선학동 쪽에 하룻밤 묵어 갈 만한 곳이 있을까요? 옛날엔 그 쪽 길목에 술도 팔고 밥도 먹여 주는 조그만 주막이 하나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

여자는 그제서야 쉰 길을 거의 다 들어서고 있는 듯한 사내의 행적을 새삼 눈여겨 보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딘가 짙은 피곤기 같은 것이 어려 있는 사내의 표정과 허름한 몰골에 금세 흥미가 떨어지는 어조였다.
"손님도 아마 선학동이 첫길은 아니신가 본디, 그야 사람 사는 동네에 하룻밤 길손 묵어 갈곳이 없을랍디요? 동네로 건너가는 길목엔 아직 주막도 하나 남아 있고요……."
사내는 바카스병을 열어 안엣것을 마시고 나서 곧 약국을 나왔다. 그리고는 이내 선창거리를 빠져 나가 선학동 쪽으로 늦은 발길을 재촉해 나서기 시작했다. 서쪽 산마루 위로 낙조가 아직 한 뼘쯤 남아 있었다.
"서둘러 가면 늦지 않겠군."

사내는 혼자 중얼거리며 걸음걸이에 한층 속도를 주었다.
……이 곳을 지난 것이 30 년쯤 저 쪽 일이던가. 그 때 기억에 따르며, 선학동까지는 이 회진포에서도 아직 십릿길은 족히 되고 남는 거리였다. 이 쪽 길목에 아직 주막이 남아 있다면, 그 선학동을 물 건너로 바라볼 수 있는 주막까지만 닿으면 되었다. 하다못해 그 선학동 포구를 내려다볼 수 있는 돌고개 고빗길만 돌아서게 되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해 안으론 어쨋거나 선학동을 보아야 했다. 선학동과 선학동을 감싸안고 뻗어 내린 물 건너 산자락을, 그 선학동 산자락을 거울처럼 비춰 올릴 선학동 포구의 만조를 놓치지 말아야 했다.”
…(하략)…

1979년 계간지 <문학과 지성> 여름호에 발표된 작품이다. 전남 장흥의 회진포가 배경이다. 해안가 선학동을 배경으로 소리꾼 아버지와 눈먼 딸, 그리고 이복 남매인 오라비의 기구한 운명을 그리고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오직 소리 하나에 신명을 바치며 떠돌이로 일생을 살아온 아버지, 앞을 보지 못하는 딸, 그리고 그들을 버리고 떠났으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계속 누이를 찾아 헤매는 오라비 등 모두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한(恨)을 치열한 예술혼으로 승화시켜, 결국에는 자연의 일부로 동화되는 경지에 이르는 한 예술인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예술혼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구성 방식 또한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수수께끼를 풀어가듯이 사태의 진상에 접근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동시에 단편소설의 미학을 잘 보여준다.
『서편제』와『소리의 빛』에 이어 발표된 ‘남도 사람’ 연작 중 한 편으로 현실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한 어린 삶의 모습과 그 한을 풀어가는 모습을 형상화함으로써 전통적 삶과 정서의 세계를 잘 표현한 수작이다.

장흥이 ‘문학의 고장’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한승원·이청준·송기숙 3명의 중견소설가가 이곳 출신이다. 특히 한승원과 이청준은 회진포구를 사이에 두고 1939년에 태어났다. 회진포는 이들을 탄생시킨 ‘문학포구’이다. 2008년 사망한 이청준은『서편제』와 『이어도』등이 대표작이다. 정치·사회적인 메커니즘과 그 횡포에 대한 인간 정신의 대결 관계를 주로 형상화했다.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승원은 35년만에 낙향, 고향에서 작품활동하고 있다. 포구 갯바위에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해산 가는 길』과 『사랑』등 수백 편에 이르는 작품을 통해 남해 바닷가를 고향의 언어인 토착어를 구사하며 반복적으로 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들보다 4년 연배인 송기숙은 1972년『백의민족』으로 제18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고,『녹두장군』으로 1994년 제9회 만해문학상, 1995년 제12회 금호예술상, 1996년 제13회 요산문학상 등을 받았다.

장흥 남쪽 끄트머리에 자리잡은 회진포. 갯벌의 김발이나 자그마한 몇척의 어선이 떠있는 한가로운 모습이 여느 포구와 다를게 없다. 한때는 부산에서 여수를 거쳐 완도까지 다니던 연락선이 거쳐갈 정도로 규모가 컸었다. 1930년대에는 장흥군내에서 생산되는 미곡(米穀)을 일본으로 실어날랐고 1970년대까지도 대덕읍에 장이 서면 금당도·금일도·완도 등 인근 섬에서 장을 보러 들어왔던 곳이다. 특히 한승원의『포구』와『안개바다』는 회진포구를 무대로 우리 민족사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쓴 소설이다.

포구(浦口)란 무엇인가? 배가 드나드는 해변의 길목으로 어부들의 삶의 시련과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장소인 동시에, 오붓한 내일을 준비하는 진취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은 패배와 아픔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소망과 현실은 늘 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포구는 내 시원(始源)과 지금의 현재의 모습을 겹쳐 생각하게 한다. 내가 얼마나 성숙해졌고, 얼마나 흐려졌는가를. 인간의 성숙은 구체적·현실적으로 사물을 보는 눈을 획득해 나감을 뜻한다. 그런데 아파하지 않고 존재 완성의 바다에 이를 수는 없다. 그것은 낭만적인 꿈들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좌절의 아픔을 생에 대한 긍정으로 아프게 끌어안을 때, 파편화된 생의 조각들은 아름답게 번득인다. 설레임과 상실과 슬픔을 포용하고 죽음과 소멸로 나아가는, 노을에 물든 포구는 황홀하다.

포구는 육지와 바다, 생과 사의 경계이다. 포구는 바다를 향한 원심력과 땅을 향한 구심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포구에는 인간·인생의 이중성이 공존한다. 포구로 가는 길은 또한 외로움과 그리움, 낭만적 동경과 환상으로의 여행이다. 포구 쪽으로 내던져진 들판 위에서 외롭고 비린내 나는 사람들의 삶과 흔들리며 저물어 가는 생의 본질을 생각하게 된다. 공간이 시간과 결합할 때 삶은 그 비밀스러운 의미를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한다. 떠나는 길과 끝나는 길이 만나는 곳,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시간이 공간과 만나는 곳. 포구는 훌륭한 문학공간이다.

‘문학의 고장’답게 장흥에는 천관산(723m)자락에 문학을 테마로 이색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이 문학공원은 천관산의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대덕만 앞바다가 눈앞에 전개되는 전망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공원에는 400여 개의 각기 다른 돌탑과 국내 유명 문인들의 육필, 메시지를 소장한 15m 높이의 문탑(文塔)이 있다. 또 자연석에 메시지를 음각하고 약력을 동판에 새겨 넣은 50여개의 문학비도 볼거리이다. 신춘의 남도를 여행하면서 문학과 작가의 고향을 음미해 볼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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