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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충우 칼럼] 자연파괴와 생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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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0.02.12  15:3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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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술가 통신일보 고문 / 한재 신충우  
 

역설적으로 인류가 1969년 달탐사에서 찾아낸 최대의 발견은 달이 아니라 지구이다. 흰 구름과 푸른 바다, 녹색의 대지가 생명을 보듬어 안고 있는 ‘푸른 별’ 지구를 처음으로 지구 밖의 별 위에서 인간의 눈으로 바라 본 것이다. 이것이 41년이 지난 오늘 신화적 상징이 되고 있는 것은 지구 생태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경고이다.

행성의 조그만 회전에도
얼마나 쉽게 익은 곡식들은
꼬투리를 떠나는가
어떤 계절도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망각의 명수들
구멍없는 바위를
좁은 빛으로 꿰려고 하는
…(후략)…

2009년 시 부문에서 풀리처상을 받은 미국 생태시인 윌리엄 스탠리 머윈의 <과부>이다.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은 결국 창조세계로부터 인간의 분리에 다름 아니며 그 결과 인간은 더 이상 자신들이 생명계의 그물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됐다. 인간은 스스로 교만에 빠져 자신을 자연과는 다른 존재로 분리해 냈지만 이는 역으로 자연계에서 인간의 축출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상기 시 <과부>는 이런 머윈의 생각이 잘 형상화돼 있는 작품이다.
1980년대 등장한 생태시는 함축성있게 생태문학을 대변한다. 생태문학은 환경 파괴와 공해 등과 같은 당면 문제를 묘사하고, 그 원인을 성찰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내용을 담는다. 문학은 인간의 행복과 참된 삶의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므로 문학가들이 작품을 통해 인류의 삶과 생존에 직결되는 생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인간은 모름지기 자연의 이자로만 삶을 꾸려야 한다. 생물다양성이 자연에 저축된 자본이고, 인간은 이것을 대출해 쓰는 것이다. 현대 환경생태학자들의 자각적인 생각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아시아인에게 이것은 그리 놀랍지 않은 생각이다. ‘인간이 되라’는 규율·작위의 사상과 ‘자연이 되라’는 초월·무위의 사상을 우리는 모순 없이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위(人爲)를 강조하는 공맹과 무위(無爲)에 노니는 노장이 한데 어우러지듯, 아시아의 오랜 문화와 철학은 ‘녹색’과 ‘성장’과 같은 이항대립적 패러다임을 적대적 구조가 아닌 관계와 융합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한다. 이는 지금까지 서구 중심으로 진전되어 온 지구환경의 논의와 해법에 새로운 단초를 시사한다.

문학은 그 사회를 반영한다. 사회․ 문화의 변화에 따라 문학의 형질과 존재방식도 변한다. 오늘날 문학은 세계의 복잡한 변화 속에서 사회․문화의 영역이 다채로워지면서 그 영역들과 긴밀히 교류하며 크고 작은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디지털 게임 시나리오와 테마파크 스토리텔링 등으로 문학의 외연이 확장되고 있는 것이 단적인 그 예다.
생태시도 같은 차원으로 20세기 중․후반 산업화의 확장 속에서 문학과 사회의 상호 텍스성을 기반으로 탄생한 새로운 시 경향이다. 현대 자본주의 문명을 발생학적 토태로 한 역사적 아이러니의 산물이다. 즉 생태시는 후기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자연과 자연 지배의 변증법’을 문학작품의 내재적인 동시에 전복적인 역사성으로 등록된 시적 결과물이다.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폐해를 고발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생태시는 근대의 ‘자연과 자연 지배의 변증법’을 내재화해 특수한 미학과 논리로 형상화한다.

문학자체의 맥락에서는 생태시는 현대시의 ‘추방된 시적 비전’을 다시 현실세계 속에서 복원하고 실현하려는 시적 시도로서 문학사적 의미를 지닌다. 생태시는 자연-인간/문명, 인간-인간의 조화와 동일성의 파괴실태를 적나라하게 증언함으로써 동일성과 조화의 시적 비전을 근대문학 속에 반어적이고 역설적인 형태로 구현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생태시는 ‘추방된 시적 비전의 귀환’을 통해 현대문명이 파괴하고 배척한 것들을 성찰하며 그것의 건강한 회복을 꿈꾸는 시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이후 생태계 문제가 전 지구적 관심사가 되면서 사회생태학, 인류생태학, 심리생태학, 정치생태학, 생태윤리학, 생태사학 등과 함께 생태문학이 인문사회과학적 생태학으로 등장했다. 이에 따라 유럽과 미국에서는 1970년대 초반부터 생태 문학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80년대 중반부터 생태문학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생태시, 생태소설, 생태비평, 생태미학, 생태페미니즘 등과 같은 다양한 개념으로 분화됐다. 문학 생태학이라는 용어는 미국의 문학이론가인 조셉 미커가 1974년 펴낸 책에서 처음 사용했다. 생태문학은 생태학과 문학이 합성된 용어로 새로운 인문주의의 화두로 등장했다.

인간 삶에 대한 이상적 가치를 미적 형식으로 담는 문학 속에 생태학이라는 학문이 접목된 것이다. 생태문학은 자연환경의 오염에 의해 나타나는 생명체의 질적 변화를 생태적, 사회적, 정치적 인식 및 생명의식에 근거해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고발하는 것이다. 생태문학은 자연과 사회에 대한 사실적 인식에서부터 출발하며 환경파괴의 사회적 원인들을 고발함으로써 독자의 비판의식과 개혁의지를 고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본래 생태학에서 말하는 생태계란 모든 생명체들이 먹이사슬의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는 자연적 공간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파악하는 좀더 포괄적인 의미로 확대 적용하면서 이 말을 쓰기 시작한 것 같다.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생태주의를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상의 하나로 꼽고 있다. 생태주의는 인간도 생태계의 일부로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모든 생물이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고 전체의 일부로 기능한다는 가이아이론과도 상통한다.

생태주의는 한마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개념인 ‘이항대립(二項對立)’을 극복한 이론이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은 모더니즘이 확립해 놓은 도그마, 원리, 형식 따위에 대한 거부 및 반작용(反作用)으로 일어난 예술 경향이다. 특히 1960년 전후의 미국·프랑스 소설의 실험적 작풍이나, 구조주의 이후의 전위적 비평을 이른다. 1970년대 중반 점검과 반성을 거쳐 오늘날에 이른다.
TV드라마에서 자주 목격하는 이항대립은 대립과 배제의 원칙을 근간으로 해 질적인 측면에서는 신선함/썩음,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안/밖, 윤리적 관점에서는 선/악, 정치적으로는 보수/진보, 좌/우 등의 대립관계를 형성한다. 이항대립의 변별성이 인간 사고의 기본 법칙으로 간주되고 있다. 학문도 이항 대립의 기초 위에 있다. 예컨대 인류학은 자연/문화라는 이항 대립에서 출발한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고대 희랍의 자연/법, 자연/기술의 이항대립적 구조에서 시작된 이래 서양철학은 정신/물질, 의식/자연, 주관/객관 등의 이항대립적 사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유럽의 철학이나 종교철학은 기본적으로 ‘이항대립’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선과 악, 생과 사, 정의와 범죄, 정신과 물질, 합리와 비합리와 같은 이항대립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이항대립이라는 사고방식이 없이는 사고의 진전을 이룰수 없다. 이른바 이원론, 이분법인 것이다. 변증법 역시 ‘정(正)’과 ‘반(反)’이 반드시 있고, 이를 바탕으로 이 두 항을 지양해 합에 이른다고 본다.

유태계 프랑스 구조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1908~2009년)는 풍부한 자료 수집과 사색을 통해 저술한『신화학1, 날것과 익힌 것』에서 문화를 구성하는 핵심요소로 음식과 결혼을 꼽고 있다.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구분하는 것은 음식물 섭취에 따른 부작용이나 소화능력에 기인하기보다는 문화적 금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개고기를 보양식품으로 애용하고 있지만 개고기를 금기시하는 문화권에서는 이를 야만행위로 치부한다. 먹을 수 있는 음식도 날것과 익힌 것으로 구별하고 이를 문화와 자연의 대립관계로 확대해석한다. 나아가 날것과 익힌 것의 중간에 썩힌 것을 등장시켜 매개항을 형성하고 썩힌 것은 날것의 자연적인 변형이며, 익힌 것은 문화적 변형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같이 레비 스트로스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날것과 익힌 것 등의 이원적 논리라 할 수 있는 대립 쌍을 통해 문화를 분류했다.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은 이 말중 Binary가 ‘두 가지, 쌍’이라는 의미이므로 두 가지 항목을 대립시켜 놓았다는 뜻이다. 이분법적 사고는 늘상 힘 있는 자의 논리로 악용돼 왔다. 이분법적 사고와 그런 행위 양식을 경계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녀, 밤낮 등 이항 대립 자체가 문제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이항 대립이 차별과 억압으로 작용하는 데 있다. 그렇다고 이항 대립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이와 달리 인간과 자연을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으로 바라보려는 시도가 생태주의이다. 즉, 생태주의는 인간도 생태계의 일부로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한다는 사상이다. ‘생태주의(Ecologism)’나 ‘생태학(Ecology)’은 서양에서 들어온 용어지만, 그렇다고 이 땅에 생태학이나 생태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생태학은 옛 사람의 삶 안에 있었다.”는 말처럼 자연과 삶의 일치를 추구한 풍수지리, 마을 숲 가꾸기, 자연을 섬기는 굿 문화, 배설과 정화의 기능을 함께 갖춘 사찰의 해우소, 동물과 식물 같은 자연 대상물이 인간과 신비한 관계나 친족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토테미즘등은 우리의 전통문화가 바로 생태주의였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생태시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1980년대. 생태시라는 말은 19세기 말 독일 동물학자 에른스트 헤겔이 처음 제시한 개념인 생태학과 시의 결합으로 이뤄졌다. 헤겔은 1866년 ‘환경에 대한 유기체의 관련에 관한 총체적인 학문’을 지칭하는 학술어로 생태학(Ecology)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이 용어는 집, 살기위한 공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Oikos와 연구라는 의미의 Logos를 결합해 만든 것이다. 즉 ‘자연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생태시는 자연환경의 오염에 의해 나타나는 생명체의 질적 변화를 생태학적․사회적․정치적 인식 및 생명인식에 근거해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현대시의 한 장르이다. 자연의 실상에 대한 현실적 인식에서 출발, 환경파괴의 사회적 원인들을 고발함으로써 독자의 비판의식과 개혁의지를 일깨우려는 목적성을 가진다. 자연친화의 욕구는 인간이 갖고 있는 본능이며,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정신적 만족을 누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자 권리이기 때문이다.
생태시의 의미는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전체를 지향하는 생태학적 세계관의 핵심에 있는 생명의 개념, 즉 생태계 중에서 생명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여주는 시를 말한다. 따라서 생태시란 생명자체를 노래함으로써 생명의 본질과 가치를 추구하는 시이며 동시에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속에서 생명의 가치와 위상, 생명고양의 조건을 살피어 그 중요성을 시적 상상력 속에 구체화 시키는 시를 가리킨다. 생태문학은, 그리고 시는 언제나 저항적이다. 자유의 억압에 대해서는 자유의 몸짓으로 폭력에 저항하고, 타락과 퇴폐에 대해서는 순수의 정신으로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 시다. 생태시는 1990년대를 중심으로 문단의 한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있으며 국내에도 2000년대들어 생태시들이 많이 발표되고 있다.

이와 달리 과거 전통적 서정시는 동시대의 사회현실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분리시켜 자연을 낙관적으로 바라보았다. 자연은 시인의 주관적 상상에 의해 얼마든지 가동되고 변형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체험의 대상이기 때문에, 전통적 서정시 속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독자의 시각은 사회현실로부터 차단됐다. 이에 따라 생태시에서는 이런 낙관적 자연관이 철저히 부정된다.

그러면 생태시의 기본 사상은 무엇인가.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동양의 철학과 사상, 특히 도가 사상과 불교는 인간중심적인 서구 문화의 대안이다. 여기에서 서구의 생태문학이, 특히 현재 생태계의 위기가 인간중심적인 서구문명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는 미국의 생태문학자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문학의 새로운 장르이다. 게리 스나이더, A.R. 에몬즈, 윌리엄 스탠리 머윈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노자의『도덕경』을 중심으로 한 도가의 무위사상에서 자연과의 대립적인 관계를 뛰어넘는 조화로운 공존의 지혜를, 그리고 불교에서 만족을 모르는 욕망의 정화와 새로운 자아로 거듭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려 한다. 특히 불교의 연기론과 만물의 상호관통 사상에서 자연과 분리돼 고통 받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자연의 유기적 전체성으로 돌아가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한다.

물질문명의 서양사상이 무너지고 정신문화의 동양사상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가. 서양이 동양의 사상을 어떻게 수용했느냐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해온 대표적인 학자는 영국 사상사학자 J.J.클라크. 그는『동양은 어떻게 서양을 계몽했는가』(1997년)과『서양의 도 : 도가사상의 서구적 변환』(2000년) 등의 저서를 통해 동서양의 관계에 있어 동양의 사상이 서양의 가치 체계에 도전해 보다 창조적이고 개방적이며 호혜적인 상호관계를 유발시켰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지적처럼 서양의 ‘궁극적 타자’로서 동양이 서구가 낳은 환경 위기를 극복하는 데 혜안을 제공해 줄수 있느냐의 여부가 생태학과 동양사상의 관계의 핵심에 놓여 있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미국 문명비판론자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년)가 동양을 서양의 타자로서 ‘일방적으로’ 규정했다면, 클라크는 서양의 지식과 권력이 동양사상의 영향을 받으며 성립됐다고 보았다. 전자의 저서『동양은 어떻게 서양을 계몽했는가』는 근대 서구 지성사를 통해 오리엔탈리즘을 역사적으로 재규정하고자 한 최초의 책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 사용되는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차별주의의 의미가 아니라 서양에 내재된 문제를 ‘동양’을 통해 극복하고자 주도적으로 수용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클라크의 이런 주장에 대해 학자들은 전적인 옹호와 극단적인 부정으로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 환경연구가 델로레스 라차펠레는 생태문제의 해결책이 노장사상이라며 긍정적인 입장을 보인 반면 동양문화를 부정적으로 보는 조던 페이퍼는 동양에 대한 환상이라고 비판한다. 1967년 <생태위기의 역사적 근원>이라는 논문에서 인간중심적인 기독교 사상을 비판한 미국 중세기술사학자 린 화이트 2세(1907~1987년)도 서구 사상에 내재된 생태사상들 속에서 서구에 유용한 혜안을 찾아낼 것을 촉구했다. 이밖에 환경윤리학자 홈즈 롤스톤 3세는 동양사상이 생태문제를 해결하는데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기보다는 서구 자체의 전통을 재평가하고 변혁하는데 간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20세기 중엽 미국의 비트작가들 사이에 유행한 동양에 대한 관심은 처참한 생태계 파괴와 그런 현상을 초래한 서구의 기술, 과학문명과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도구적 이성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동양에 대한 관심과는 대조된다. 비트작가 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비단체적인 그룹의 시인과 소설가를 말한다. 비트(Beat)라는 단어에는 ‘굴복당하다(그 시대의 억압적인 문화에 의해서)’라는 뜻과 함께 ‘행복에 겨운(많은 비트작가들은 불교·유대교·기독교적 신비주의 또는 환각을 일으키는 마약 등의 약물에 의한 황홀경을 경험하려고 했다)’이라는 뜻이 있다. 이 단어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이들은 사회적으로는 무정부주의적인 개인주의 색채가 짙고 재즈, 술, 마약, 동양적인 선(禪) 등에 의한 도취로 ‘지복(至福)’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애썼다.

동양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넓게는 20세기 들어 서구 문명의 패러다임의 변화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서구 과학의 전통적인 초석들이 점차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확실성, 객관성, 이원론 그리고 결정론 같은 전통적인 가치가 와해되고 비이원론적, 비환원적, 통합적, 구조적, 전체론적 그리고 실체론이 아니라 관계론적, 기계론적이 아니라 유기체적인 세계관이 부상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대 생태 위기는 의식의 혁명과 정신의 개혁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심층생태론자들이 동양의 종교와 사상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심층생태학은 자연을 소중하게 여기며 네덜란드 스피노자, 영국 화이트헤드 등의 철학에 눈을 돌리는 한편 동양의 사상과 종교, 특히 불교와 도교의 사상에 주목하는 것이다. 심층생태학을 창시한 노르웨이 철학자 아르네 네스 사상의 근본은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의 ‘원자적 자아’에 대행, ‘전체론적인 자아’를 주장하는 스피노자의 철학과 동양사상, 특히 불교이다.

대표적인 미국 생태작가들의 사상에 이같이 동양사상이 핵심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생태작가들은 동양의 자연관과 사상에서 생태적 사유의 단초를 찾아내는 한편 이러한 단초들을 진일보시켜 나름대로의 생태적 비전을 형상화한다. 생태불교와 생태도교는 동양의 전통 사상에 대한 미국, 나아가 구미의 새로운 해석으로 현대 생태학과 동양사상의 결합이 낳은 산물이다.

이같은 생태중심론에 반해 나온 것이 자연을 ‘문화’로서 이해하려는 문화중심주의 자연관이다. 자연을 문화적 측면에서 보고자 하는 이들은 생태중심주의자들이 순수자연이라고 주장해온 야생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자연은 문화의 창조물이며 역사의 부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생태중심주의자들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순수한 자연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를 대립적 개념으로 보고 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자연 유산 176개 중에도 문화적인 가치까지 복합 인정된 곳이 25개나 된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자연을 이해함은 가치론적 관점에서 자연을 도구적 가치로만 봄으로써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부정하게 된다. 사슴이 가치있음은 우리가 사슴을 사냥할 수 있고 먹고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그들의 이러한 가치관을 잘 보여준다. 사회정의를 윤리와 가치의 중심으로 삼는 막스주의자들은 자연 안에 인간의 복지를 위해 공헌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치있다고 본다. 이와 같이 도구적 관점에서만 자연의 가치를 인정하는 막스주의자들은 심층생태학이 말하는 자연은 자율적이고 비역사적인 개념이 될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생태중심론자들은 오히려 막스주의자들이 자연의 도구적 가치만을 인정할 뿐, 자연의 내재적 가치는 부정한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자연의 생태계는 상호연결성과 총체성에 의거 자체조절능력을 발현한다. 별도의 중앙관리체계와 정보전달 체계가 존재하지 않아도 모든 구성요소간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이 개입된 생태계에 있다. 자연의 문화사는 생태계만의 상호관계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이 반영되는 질문과 탐구의 지속적인 흐름에 존재한다. 즉 인간의 행위는 생태계의 상호연결 관계에 개입해 총체적인 구조 및 자체조절능력을 간섭, 또는 내재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고유의 도구 및 기술과 행위양식을 지니고 생태계에 참여한다. 또한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이 일을 사회적 협동을 통해 수행한다.

결국 이러한 도구에서부터 신념, 관념에 이르는 일련의 사항들은 시대마다 다르고 사회집단마다 다른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 체계가 바로 삶의 방식인 문화가 되는 동시에 자연의 문화사를 설명하기 위한 배경이 된다. 인간은 자연을 접하는 구체적 통로이면서도 자연과 대비되는 인간 고유의 산물인 ‘문화’를 매개로 해 자연으로부터 물질과 에너지를 얻고, 자연과 상호 작용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문화를 만들었고 그 후에는 자신들이 생성한 문화에서 또 다른 문화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가 왜 자연의 문화사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답안을 강구하는 유일한 방안이자, 하나의 방법론을 강구할 수 있게 한다.

녹색 깃발이 지구촌을 뒤덮은 가운데 한국시에서도 생명과 환경의 가치를 내세운 생태시가 소리 없이 시단의 저변을 차지하고 있다. 경기도 김포출신인 이문재 시인은 한국의 생태시운동을 이끄는 시인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1982년 등단한 시인은 2000년대 들어 생태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서정시의 새 지평을 연 공로로 소월시문학상·지훈문학상·노작문학상 등을 잇달아 받았다.

그의 생태시는 도시의 일상에 갇힌 몸에서 출발해 걷기와 느림으로 대표되는 21세기 지구촌의 새로운 생활감각을 재치 있게 반영하면서 세속인간의 내면에 숨은 성(聖)스러움을 찾아간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인은 자신의 몸에서 타인과 자연, 지구촌을 거쳐 저 멀리 우주에까지 이르는 상상력의 확장을 보여준다. “누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이 아니라 그 너머를 바라보자./ 아니다, 달에서 손가락을 내려다보자”(시 <일식의 경우>부분)
동시에 시인은 그 넓은 네트워크의 공간이 사실은 자신의 왼손에서 오른손에 이르는 짧은 거리에 놓여 있다는 시적 아이러니를 전개한다. “손이 하는 일은/ 결국 다른 손을 찾는 것이다/ 오른손이 왼손을 찾아/ 가슴 앞에서 가지런해지는 까닭은/ 빈 손이 그토록 무겁기 때문이다/ 미안함이 그토록 무겁기 때문이다.” (시 <손은 손을 찾는다>부분)

이문재 시인은 “크게는 지구적 차원에서, 작게는 나와 내 이웃의 차원에서 ‘근원’과 ‘관계’를 성찰하는 것이 생태시의 핵심”이라고 본다. 노작문학상 수상작인 <물의 결가부좌>에서 스스로를 ‘뗏목에 엎드려 연꽃 사이로 나가서, 연못의 중심으로 스며들어, 수천수만의 연꽃들이 몸 여는 소리 들으려, 제 온 몸을 넓은 귀로 만드는 사내’로 묘사한다.

자연 파괴의 현실을 생생히 증언하는 장석주의 시 <밤하늘은 아름답다>는 한스 모어가 말하는 ‘생명윤리’에 대한 각성의 문제를 동화적인 상상력과 미학적인 수사들을 통해 몽환적인 분위기로 형상화한다.

폐수는 하늘로 간다 하늘은 죽은 물이 묻히는 곳
폐수는 다른 데로는 갈 곳이 없어 하늘 무덤으로 간다
하늘의 호수에 사는 물고기들은 등이 잔디밭 빛깔이지만
눈은 애꾸눈이다 수은을 먹고 물고기의 눈들은 야광이다
밤하늘을 쳐다볼 때마다 호수에 떠도는 야광눈을 본다
얼마나 많은 물고기들이 푸른 빛을 뿜는 애꾸눈으로 떠다니는가
밤하늘은 왜 그렇게 찬란하고 아름다운가
…(하략)…
충남 논산 출생 장석주의 시 <밤하늘은 아름답다> 일부이다.

그러나 생태시가 문학적으로 무조건 옹호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개발을 반대하는 ‘생태원리주의’에 빠진 채 현실을 간과하고 ‘환경보호’라는 너무나 자명한 주장만 되풀이하기 때문에 도식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조금 알면 오만해진다. 조금 더 알면 질문하게 된다. 거기서 조금 더 알게 되면 자기를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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